<동행하는 화가>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
알브레히트 뒤러
저게 사자라고?
헤라클레스는 네메아의 사자 앞에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녀석은 제우스마저 결투에서 진 적 있는 최악의 괴물 티폰, '모든 돌연변이의 어머니'로 불린 에키드나 사이에서 나온 초대형 사자였다. 그간 만난 괴수와는 차원이 다른 괴물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헤라는 정말로 내가 죽길 바라는군. 헤라클레스는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명령이든 해보시오. 온 가족을 몰살한 내 죄를 씻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기꺼이 하겠소."
헤라클레스가 말하자 에우리스테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첫 과업을 지시했다. 그게 바로 네메아의 사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놈이 사람을 해치고, 농작물을 마구 짓밟는 통에 피해가 이어지고 있어. 일대의 모든 사냥꾼이 녀석의 저녁밥이 됐지. 자네의 명성은 잘 알아. 그러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 헤라클레스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에우리스테우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사실은 헤라의 명령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네메아로 향했다. 사자는 계곡 깊숙한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무지막지한 남자가 올 거야. 그놈 척수 깊숙한 곳에 송곳니를 박아버리렴.' 녀석 또한 헤라의 귀띔을 받은 듯.
헤라클레스는 곧장 활부터 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의 본능적 행동이었다.
화살은 사자의 목덜미를 향해 맹렬히 날았다. 이대로면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날 듯도 했다. 그런데, 화살은 사자 가죽에 맥없이 튕겨나왔다. 이번에는 팔을 길게 뻗어 창을 내리꽂았다. 이 또한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역시 쉽지 않았다. 헤라클레스와 사자는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헤라클레스는 올리브 나무를 꺾어 만든 몽둥이로 녀석의 두개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사자 또한 날카로운 송곳니로 이 사냥꾼의 숨통을 노렸다. 둘은 1개월 가까이 싸웠다는 설이 있다. 헤라클레스도, 사자도 지쳤다. …어떤 무기도 녀석의 가죽을 뚫지 못한다면, 목을 졸라 죽일 수밖에 없다. 헤라클레스는 레슬링하듯 사자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의 긴 발톱이 살을 파고들 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억지로 참고 버텼다. 헤라클레스는 두 손으로 사자의 목울대를 쥐었다. 놓치지 않았다. 한나절 내내 졸랐다. 발악하던 사자가 드디어 몸에 힘을 뺐다. 그대로 축 늘어졌다. 죽었다. 끝이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헤라클레스와 네메아의 사자' |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헤라클레스와 네메아의 사자' |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헤라클레스가 사자의 목덜미를 잡고 꽉 누르는 장면을 그렸다. 헤라클레스만큼이나 근육질인 사자는 그의 팔과 다리를 할퀴며 발악하지만, 곧 숨통이 끊길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은 둘의 싸움을 레슬링처럼 묘사했다. 통하지도 않는 몽둥이와 화살은 진작에 바닥으로 휙 던져놓은 모습이다.
헤라클레스는 두 다리를 뻗고 누워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에우리스테우스에게 돌아가려고 할 때, 괜찮은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녀석의 단단한 가죽을 벗겨 몸에 두른다면? 헤라클레스는 그놈의 발톱을 뽑았다. 그걸로 가죽을 벗겼다. 이제 헤라클레스는 어디서든 사자 가죽을 썼다. 강철 갑옷보다 단단한 보호막이었다. 에우리스테우스는 설마 헤라클레스가 살아올 줄은 몰랐다. 네메아의 사자를 죽이고, 그 가죽까지 뜯어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겁에 질린 에우리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두 번째 과업은 무엇이오?" 다른 이였으면 이 일 하나로도 충분히 영웅 놀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에게는 겨우 첫걸음이었다.
"레르네 늪에 머리 아홉 달린 히드라가 있어. 엄청나게 큰 물뱀이야. 이놈이 사람을 마구 잡아먹어 난리라고 해. 자네가 나서주면 좋겠군. 녀석을 죽이게. 다만 주의해야 할 건…."
"뭐요?"
"녀석의 머리를 베면 그 자리에서 새로운 두 개의 머리가 자란다는 소문이 있어. 게다가 가운데 머리는 아예 베이지도 않는다고 하는군."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조카 이올라오스와 함께 레르네 늪을 찾았다. 아홉 머리가 제멋대로 나풀대는 히드라의 실제 모습은 소름이 끼쳤다. 헤라클레스는 히드라의 머리 한 줄기를 잡고 쑥 벴다. 그런데 소문이 맞았다. 그 자리에서 두 개의 머리가 튀어나오는 걸 보고 기겁했다. 점점 커지는 그 머리들을 움켜쥐고 다시 벴다. 그러자 네 개의 머리가 순식간에 자랐다. 이래서야 끝이 없었다.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 '헤라클레스와 히드라' |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의 '헤라클레스와 히드라'는 헤라클레스와 관련한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에 속한다. 네메아 사자의 가죽을 뒤집어쓴 헤라클레스가 올리브 나무 몽둥이를 들고 어떻게든 히드라를 죽이려고 한다. 이미 그의 발밑에는 잘린 머리통이 꿈틀댄다. 히드라는 그런 헤라클레스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린다. 발톱과 꼬리로 다리를 움켜쥐고 있다. 헤라클레스의 표정에서 알 수 있듯, 그 또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귀스타브 모로, '헤라클레스와 히드라' |
귀스타브 모로는 히드라를 끔찍하고도 소름 돋는 괴물로 그렸다. 히드라는 방금도 인간의 살점을 물어뜯은 듯 입에서 피를 흘린다. 피비린내가 날 것 같은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녀석 주변에는 이미 인간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다.
현대인이 헤라클레스에 대해 갖는 오해 중 가장 큰 건 그의 지적 수준이 높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실제로는 그 힘만큼은 아니지만, 꽤 높은 수준의 지력과 재치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최고 신 제우스의 아들이었다. 최고 스승 케이론의 제자였다. 그런 헤라클레스가 무식할 리 없었다. 외려 손발이 좋아도 너무 좋았던 만큼, 굳이 머리를 쓸 일이 많지 않았던 쪽에 속한다. 몽둥이질 한 번이면 모두가 무릎을 꿇으니 정교한 계획을 짤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헤라클레스도 전략을 짜야했다.
"이올라오스. 멈춰보렴." 헤라클레스는 그처럼 진땀을 빼고 있는 이올라오스의 어깨를 잡았다. "내가 히드라의 머리 한쪽을 베면 네가 그곳에 불을 붙여봐. 어떤 생명도 잿더미에서는 피어날 수 없는 법이야." 작전은 통했다. 히드라는 불길에 우짖을 뿐, 새로운 머리를 만들지 못했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헤라클레스와 히드라' |
수르바란은 네메아의 사자에 이어 히드라도 그렸다. 눈여겨볼 건 헤라클레스 뒤에서 불을 들고 있는 이올라오스다. 히드라도 이들의 작전을 눈치챈 듯 불안한 표정을 짓는 듯하다. 남은 건 가운데 머리 하나였다.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는다는 말 또한 맞았다. 외려 칼자루가 뽑히고, 창이 부러졌다. 헤라클레스는 또 머리를 굴렸다. 어디에 영영 가두면, 그것도 사실상 죽인 것과 다름없지 않나. 헤라클레스는 눈에 보이는 바위산을 뽑아버렸다. 그걸로 히드라의 마지막 머리를 찍어 눌렀다. 머리가 깔린 녀석은 영영 오도 가도 못할 처지였다.
헤라클레스는 몸부림치는 히드라에게 다가섰다.
히드라는 몸 곳곳에서 진물 같은 피를 질질 흘렸다. 헤라클레스는 그의 화살 다발에 녀석의 피를 하나씩 묻혔다. 히드라의 피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모든 독 중 가장 극악한 독이었다. 한 방울만 스쳐도 몸을 끔찍하게 뒤틀며 죽는 맹독이었다. 불사의 신조차도 닿으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할 만큼 괴로운 물질이었다. 그걸 헤라클레스가 가졌다. 올리브 나무 몽둥이와 네메아 사자의 가죽, 히드라의 독…. 이 모든 건 헤라클레스만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케리네이아 산에 사는 황금 뿔 암사슴을 죽이게. 히드라를 제압한 건 알겠으니 그 독화살은 치우고."
"그건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가장 사랑하는 동물이오. 잘못하면 그녀의 신벌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혹시 함정이 아니오?"
"자, 잠깐 기다려보게. 그래. 죽이지는 않아도 되겠어. 그 대신 아무 상처도 입히지 않고 잡아 올 수 있는가. 내가 볼 때는 그게 훨씬 더 어려워보이긴 한다만."
하지만 그건 평범한 인간 에우리스테우스의 생각일 뿐이었다.
티폰이 낳은 괴물 사자를 때려잡고, 머리 아홉 달린 불사의 바다뱀까지 패대기친 헤라클레스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남은 여덟 과업 모두 앞선 두 시련만큼 힘든 일은 없을 게 분명해 보였다. 헤라클레스는 무작정 케리네이아 산에 들어가 달렸다. 찾는 건 쉬웠다. 멀리서 번쩍이는 황금빛을 쫓았다. 성질 같아선 바로 활을 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헤라클레스보다 먼저 지친 건 사슴이었다. 기어코 붙잡았다.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 '헤라클레스와 아르테미스의 사슴' |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는 헤라클레스가 사슴을 추적하는 모습, 사슴의 뿔을 잡고 제압하는 장면 등을 한 화폭에 그렸다. 그림 속 헤라클레스는 외려 차분해보인다. 딱히 힘들어보이진 않는다. "네 놈은 누구인가." 이때, 주변 모든 나무가 흔들릴 만큼 앙칼진 목소리가 퍼졌다. 아르테미스였다. "여신님. 저는 제우스 신의 아들 헤라클레스입니다." "내 사슴을 괴롭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헤라클레스는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헤라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아르테미스(헤라는 그녀의 어머니 레토를 죽도록 괴롭힌 적이 있다)는 더는 따지지 않았다. 다만 조건은 확실했다. "사슴에게 상처 하나라도 낸다면, 그때는 내가 너를 활로 쏴 죽이리라."
"길러보고 싶을 만큼 어여쁜 사슴이군."
"여기 와서 직접 받아 간다면 내가 넘겨드리리다."
에우리스테우스가 홀린 듯 다가왔다. 헤라클레스는 소중히 안고 있던 사슴을 풀었다. 사슴은 창문을 타고 순식간에 도망쳤다. 저 멀리 수풀을 향해 사라졌다.
"왕께서 너무 꾸물대셨군."
"흠흠…. 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비웃을 수 있을지 보겠소. 다음은 에리만토스의 거대 멧돼지라오. 이번에도 죽이지 말고 잡아 오시오."
작자 미상(17세기경), '에리만토스의 멧돼지로 에우리테우스 왕을 위협하는 헤라클레스' |
에리만토스의 멧돼지는 덩치가 집채만한 야수였다.
난폭한 성질, 엄청난 먹성에 애써 일군 농경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짐승이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에게 이번 일은 쉬어가기와 다를 게 없었다. 그래봤자 멧돼지였다. 신이나 괴물의 피가 섞이지도 않았다. 헤라클레스는 멧돼지에 냅다 몽둥이를 휘둘렀다. 몇 대 얻어터진 녀석은 곧장 도망치기 바빴다. 헤라클레스는 열심히 뒤쫓지도 않았다. 그냥 소리나 지르면서 인근 설산으로 몰았다. 네 다리가 눈에 푹푹 빠져있을 때 가볍게 들어 올렸다. "나랑 잠시 같이 갈까." 멧돼지는 새끼 강아지처럼 낑낑댔다.
페르디난도 타카, '헤라클레스와 에르만토스의 멧돼지' |
17세기 이탈리아 조각가 페르디난도 타카가 이 장면을 조각으로 빚었다. 근육질의 헤라클레스가 멧돼지를 야산의 들개 업듯 둘러메고 있다.
"건너편 나라 엘리스를 통치하는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을 청소해오게."
"이것도 과업이오?"
"가보면 알 것이야. 그 인간은 3000마리의 소를 키우는데, 30년 넘게 가축우리를 청소하지 않았어. 상상 이상으로 더러울 것이야."
"알겠소. 그런데, 이 멧돼지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내가 확인했으니까 이제 그냥 풀어줘. 이, 이쪽으로 다가오지 말고!"
직접 본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은 상상 초월이었다.
인간에 대한 증오가 들 정도였다. 토악질을 참기가 힘들었다. 3000마리 소가 뿜은 분뇨는 산처럼 쌓였다. 차라리 식인 멧돼지를 몇 마리 더 때려잡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게…. 어느 순간부터 감당이 되지 않아서 말이오." 아우게이아스 왕은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하라면 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엄청나게 긴 세월이 흐를 것이었다. 히드라를 잡을 때 그랬듯, 헤라클레스는 손발의 고생이 통하지 않을 때야 머리를 쓰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헤라클레스는 외양간 옆에 강이 있다는 데 주목했다. 돌과 나뭇가지를 마구 올려 물길을 바꿨다. 강물이 외양간을 관통해 흐르게끔 했다. 세찬 물줄기가 가축우리를 말끔하게 청소했다. 이번 일 때문에 '아우게이아스의 가축우리(Augean stable)'라는 말이 생겼다. 오랜 시간 누적돼 어느 순간 풀기가 힘들어진 문제점 덩어리를 뜻한다. 기발한 수법으로 케케묵은 장애물을 뚫는 일을 빗댈 때도 쓰인다.
작자미상, '마구간을 청소하는 헤라클레스'(삽화) |
1808년 작자 미상의 한 삽화를 보면 당시 헤라클레스의 막막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소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천진난만하게 돌아보고 있다. 그 밑에는 분뇨인지, 헤라클레스가 끌어들인 강물인지 모를 게 흐르고 있다. 헤라클레스의 정색으로 미뤄볼 때, 분뇨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보인다.
"다음은 사람을 찢어먹는다는 스팀팔로스 호수의 괴물 새 떼를 죽이는 일이야."
"그건 전쟁의 신 아레스가 기르는 새 아니오? 또 신의 미움을 받으라는 건가?"
"아르테미스의 암사슴 건을 잘 처리한 것처럼, 이번에도 알아서 잘해보시게."
"꼭 죽여야 하오?"
"지금 과업에서는 그게 핵심이야."
죽이는 일이야 어려울 게 없었다.
문제는 아레스의 보복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운명은 헤라클레스의 편이었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등장했다. 아테나는 이복동생인 아레스의 앙숙이자 라이벌이었다. 인간 세계 최고의 사냥꾼이 아레스가 가장 아끼는 새를 잡으러 간다는 소문을 듣고 신나서 온 것이었다. "내 방패를 빌려주지." 아테나가 말했다. "아레스 녀석도 내 방패를 보면 쉽게 달려들지 못할 거야. 내가 뒤를 봐주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강력한 우군을 얻은 헤라클레스는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 식인 괴물 새들은 청동 날개와 부리, 발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청동은 네메아의 사자 가죽을 뚫지 못했다. 헤라클레스는 차근차근 활을 쐈다. 괴물 새들은 히드라 독이 묻은 화살을 맞고 고통스럽게 죽었다.
알브레히트 뒤러, '스팀팔로스의 새를 죽이는 헤라클레스' |
귀스타브 모로, '스팀팔로스 호수에 있는 헤라클레스' |
15~16세기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이 장면을 잘 묘사했다. 두 눈 부릅뜬 헤라클레스가 새를 향해 활을 쏘고 있다. 새는 인간 여성의 상체와 뱀의 꼬리, 두툼한 날개를 갖고 있는 것으로 그려졌다. 올림포스산에서 아레스가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아테나의 방패를 본 그는 차마 내려가지 못했다. 헤라클레스 하나도 상대하기 벅찬데, 그 틈을 노려 아테나까지 달려들면 역으로 당할 게 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용케도 아레스의 분노에서 벗어났군."
"운이 좋았소."
"일곱 번째 과업은 크레타의 미친 황소를 잡아오는 걸세.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만든 말인데, 아무래도 거기에서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온갖 곳을 헤집고 다녀 온 국민이 공포에 떨고 있다고 해."
맹렬한 파도에서 태어난 이 황소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포세이돈은 이 짐승을 당연히 자기한테 제물로 올릴 줄 알았다. 그러면 모른 척 받고는 주변 신들에게 거드름이나 부릴 요량이었다. 크레타의 미노스 왕은 이 늠름한 황소가 좋았다. 그는 꾀를 부렸다. 녀석을 바치는 척 그냥 다른 소를 바쳤다. 모욕감을 느낀 포세이돈은 자기가 만든 황소에 광기를 심었다. 미쳐 날뛰게 했다. 헤라클레스는 그런 녀석과 신중하게 맞붙었다. 그래봤자 한주먹거리였다. 외려 죽이지 않는 게 더 힘들었다. 실수로 숨통을 끊는다면 그간 모든 고생은 물거품이 될 터였다. "자네는 황소를 잡으러 온 건가, 그냥 쓰다듬으려고 온 건가." 사정을 알 리 없는 미노스가 헤라클레스를 놀렸다. "왕의 욕심 때문에 빚어진 일입니다. 왕께서는 이놈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으실 겁니다." 헤라클레스는 저주 섞인 말로 응수했다. 그러자 미노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사실은…. 이미 그렇소." 그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왕비 파시파에가 저 황소를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소. 황소의 아이라도 낳을 기세라오." 애석하게도 미노스의 이 말은 곧 현실이 되고 만다.
작자미상(16세기경), '헤라클레스와 크레타의 황소' |
16세기경 그려진 그림을 보면, 헤라클레스는 한 팔로 소를 제압하고 있다. 이를 본 미노스가 쓸데없는 말을 건네는 듯하다.
"여덟 번째 과업은 디오메데스 왕의 식인 암말 네 마리를 생포하는 것이야. 각각 포다르고스(빠른 녀석), 람폰(빛나는 녀석), 데이노스(끔찍한 녀석), 크산토스(노란 녀석)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군. 입에서 불을 뿜는다는 말도 있어."
"그런 건 상관없소."
"이것도 알아두게. 디오메데스 왕도 식인 암말만큼 정상은 아닐 테야."
"이번에 잡아온 황소는 어떻게 하면 되겠소."
"헤라 여신에게 바칠 생각이었는데, 받을 생각이 없으신 듯해. 어디 넓은 평야에 놔주게."
식인 암말들의 먹이는 전쟁 포로와 죄수였다.
헤라클레스는 디오메데스의 이러한 끔찍한 취미를 경멸했다. 디오메데스 또한 자기가 애지중지 키운 암말 무리를 제압하겠다는 헤라클레스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디오메데스는 광기의 왕이었다. 애초 사람을 잡아먹는 말을 키운 자체가 정상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그는 헤라클레스의 명성을 잘 몰랐다. "내 말을 데려가겠다고? 어디 그렇게 해보시든가." 그는 헤라클레스가 보는 앞에서 말들을 풀어버렸다. 끔찍하게 죽으라는 뜻이었다. 헤라클레스는 태연히 서 있었다. 불을 뿜으며 달려오는 말의 머리통만 한 대씩 후려쳤다. 공중으로 붕 뜬 녀석들은 진흙탕에 몸을 처박았다. 어느새 순하디 순한 말 네 마리만 있을 뿐이었다. 헤라클레스는 디오메데스가 보인 잔혹함에 응수했다. 그의 멱살을 잡고선 녀석들에게 던졌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 말에게 건넨 헤라클레스의 명령은 간결했다. 디오메데스는 자기가 길들인 말들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장 밥티스트 마리 피에르, '헤라클레스에게 살해되고 자신의 말에게 잡아먹히는 디오메데스' |
18세기 프랑스 화가 장 밥티스트 마리 피에르가 이 장면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헤라클레스가 식인 암말에게 디오메데스를 내던지고 있다. 녀석들은 이젠 한 끼 밥밖에 되지 않는 디오메데스를 향해 군침을 흘리는 중이다.
"끝을 향해 가는가? 아마존 여왕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갖고 오시게."
"방법은 상관없소?"
"빼앗든, 훔치든, 건네받든 다 괜찮소. 히폴리테가 이 시대 최고 여전사인 건 알고 있지? 네메아의 사자를 잡는 것만큼 힘들 걸세."
에우리스테우스의 예측은 또 엇나갔다.
히폴리테는 분명 남자에게 호전적이었다. 잔인하게 죽이기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자기보다 약한 남자에게나 하는 짓이었다. 그간 본 모든 남자가 그녀보다 약골이었기에 그랬던 일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히폴리테는 육중한 풍채의 그를 보자마자 인정했다. "허리띠? 나와 함께 하룻밤을 보낸다면 풀어서 주겠네." 히폴리테가 제안했다. 이 거구가 품은 압도적 유전자를 갖고 싶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데? 헤라클레스 입장에선 싸우지 않고도 허리띠를 얻을 기회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는 안 될걸?" 올림포스산에 있는 헤라가 비웃었다. 이쯤 헤라는 초조했다. 저 꼴 보기도 싫은 녀석이 열 개 과업 중 벌써 아홉 번째를 끝내려고 했다. 막아야 했다. 헤라는 또 수를 썼다. 헤라클레스와 히폴리테의 부하들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었다. 서로를 못 믿게 했다. "너무 친절한 게 더 이상해요. 저 여자가 암살할 수도 있어요." "심상치 않아요. 허리띠는 핑계고 우리 일족을 몰살하려는 게 아닐까요?" 불신은 끝내 폭발했다. 양측의 부하들은 한밤중 전투를 벌였다. 히폴리테 쪽 여전사들은 헤라클레스가 죽어야만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헤라클레스와 히폴리테가 있는 침실로 침투했다.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한 헤라클레스는 그대로 히폴리테의 목을 졸라 죽였다. 헤라클레스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히폴리테가 대신 맞고 죽었다는 설도 있다. 헤라클레스는 허리띠를 얻었지만, 히폴리테는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니콜라우스 크뉘퍼,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빼앗는 헤라클레스' |
17세기 독일 출신의 화가 니콜라우스 크뉘퍼는 헤라클레스가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낚아채는 장면을 그렸다. 깜짝 놀란 표정의 헤라클레스 앞에 선 히폴리테가 무언가를 대신 막아주는 듯도 하다.
"이제 마지막 과업을 말하시오."
"세 개의 머리, 세 개의 몸통을 달고 있는 '괴물 왕' 게리온이 기르는 암소를 훔쳐 오시게. 게리온은 서쪽 가장 끄트머리 땅에 살고 있으니,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테야."
"이것만 하면 열 개의 과업을 다 끝내는 셈이오. 그렇게 되면 내 죄도 깨끗하게 씻을 수 있을 것으로 믿소."
"물론이오. 잠깐만. 음…. 이보게.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는 에우리스테우스의 표정에서 불길함을 읽었다. "무슨 일이오?" "자네는 두 개의 과업을 더 해야 해. 앞으로 하나가 남은 게 아닌, 세 개가 더 남았다는 뜻이오." "대체 왜!" 헤라클레스는 쩌렁 고함을 질렀다. "어, 엄밀히 말해 히드라는 가둬두기만 했을 뿐 죽이지는 못하지 않았는가. 또…. 아우게이아스 왕의 더러운 외양간은 자네가 아닌 강물이 청소한 셈이야. 그러니까 두 개가 더해지는 걸세." 에우리스테우스도 재차 말을 더듬으며 진땀을 뺐다. 이건 당연히 그의 뜻이 아니었다. 잔뜩 약이 오른 헤라의 생각이었다. 에우리스테우스도 이건 너무한다 싶었지만, 감히 여신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헤라클레스는 그대로 무너졌다. 서러움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분노로 땅을 칠 때마다 균열이 일었다. 그러면 앞으로 남은 건 세 개의 과업이었다. "어서 다녀오게. 그, 그다음 자네가 갈 곳은 절세 미녀로 통하는 헤스페리데스 자매가 있는 정원일 테니까." 헤라클레스가 멈칫했다. "자네도 그곳의 실체를 알고 있는 모양이군?" 헤라클레스에게 조금만 더 인내심이 없었다면, 그는 후일은 생각지 않은 채 헤라와 에우리스테우스에게 히드라의 화살을 쐈을 터였다. 그만큼 그가 가야 할 곳도, 만나야 할 상대도 최악이었다.
앨버트 허터, '헤스페리데스의 정원' |
미국 화가 앨버트 허터의 그림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을 언뜻 보면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워보인다. 아름다운 님프 셋이 낮잠을 자고 있다. 그런데, 한 님프가 손에 쥐고 있는 건 분명 황금 사과다. 그 밑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생명체의 기다란 꼬리가 보인다. 헤라클레스마저 두려워하는 이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헤라클레스의 남은 과업은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참고 자료〉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웅진지식하우스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디스 해밀턴, 현대지성
〈후암동 미술관 작품 편 읽는 순서〉
1)“내 딸이 얼어죽을뻔 했어!” 식은 욕조에 女모델 뒀다가 소송갈 뻔한 사연[후암동 미술관-존 에버렛 밀레이 편] - 오필리아 (2023. 9. 2.)
2)“그녀 남친을 제가 죽였어요” 짝사랑 훔쳐보던 괴물, 무슨 짓을 벌였나[후암동 미술관-오딜롱 르동 편] - 키클롭스 (2023. 9. 16.)
3)“몸값만 900억원 이상!” 13명 품에 안긴 男실종사건…정말 화형 당했나[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가셰 박사의 초상 (2023. 9. 30.)
4)“그남자 목을 주세요” 춤추는 요부의 섬뜩한 유혹…왕은 공포에 떨었다[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모로 편] - 유령(환영) (2023. 10. 14.)
5)“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 페스트 (2023. 10. 28.)
〈후암동 미술관 신화 편 읽는 순서〉
1)“독수리가 간 쪼아도 참는다” 최악고문 받는 男, 무슨 사연[후암동 미술관-프로메테우스 편] (2023. 9. 9.)
2)“도저히 못참겠어” 봉인 푼 그녀, 외마디 비명…惡은 그렇게 쏟아졌다[후암동 미술관-판도라 편] (2023. 9. 23.)
3)“네 엄마 뼈를 던져라” 화들짝 놀란 명령…울면서도 할 수밖에[후암동 미술관-데우칼리온 편] (2023. 10. 7.)
4)“앗, 아파” 근육질 아기가 빨아들인 모유…뻥 걷어차고 싶었지만[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편] (2023. 10. 21.)
5)“절세미녀 셋이 있는 곳에 가쇼” 근육男은 공포에 떨었다…무슨 일[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②편]
yul@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