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B 고점에서 국채 대규모 편입
긴축 이후 손실 급증, 예금 불안↑
은행 자산구조·만기불인치 원인
타은행 확산시 금융시스템 마비
정부·연준 예금보증·유동성공급
시스템 개선 안되면 재발 가능성
연준, 긴축기간 돈 푸는 딜레마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은 무엇일까? 아마 달러 또는 미국 국채라는 답이 가장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국 국채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어떻게 될까?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이 전세계 금융시장에 공포의 불씨가 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예금 전액을 보증하고 연방준비제도(Fed)도 은행들이 보유한 국채를 담보로 돈을 빌려하면서 일단 대규모 인출사태는 진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와 달리 원리금 회수가 가능한 국채의 가격변동 위험에서 비롯된 사태인 만큼 당장 금융위기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한적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국채 가격 변동에 취약해진 미국의 은행들의 재무제표가 근본 원인이다. 자산 구조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연준의 추가 긴축으로 채권 가격이 하락하면 또다시 은행 건전성에 불안을 느낀 예금이 대규모로 움직일 수도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사태일 수 있다.
파산한 실리콘밸리은행의 자회사인 영국지사(SVB UK) 사무실이 있는 알파베타 빌딩의 모습. BBC 방송과 로이터·블룸버그 통신은 12일(현지시간) 런던은행 컨소시엄이 SVB UK 인수를 공식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AFP] |
▶어쩌다 이런 일이
SVB 뱅크는 이름 그대로 실리콘밸리 기업들과 주로 거래해왔다. 기술기업에서 받은 예금을 다시 기술기업에 투자하는 사업구조다. 2021년 증시 활황으로 기술기업들은 엄청난 투자를 유치한다. 이들은 한꺼번에 들어온 목돈을 거래은행인 SVB에 예금으로 맡겼다. 2021년 한 해에만 SVB 예금은 1200억 달러에서 1890억 달러로 급증한다.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의 예금을 받은 SVB는 돈을 굴릴 곳이 마땅치 않아지자 가장 안전한 미국 국채에 투자한다.
그런데 지난해 연준의 긴축으로 금리가 오르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채권가격이 하락하고 SVB는 막대한 평가 손실을 입게 된다. 이같은 SVB의 재무상황이 알려지면서 예금주들의 인출이 시작됐다. 기업 예금은 대부분 예금자보호 한도인 25만달러 이상이다. 게다가 모바일로도 간편하게 인출이 가능해진 시대다. 짧은 시간에 대규모로 이뤄지는 인출에 응하기 위해 SVB는 더 많은 채권을 헐값에 급히 팔아야 했고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시장은 왜 긴장하나
미국 은행들은 대출채권을 대규모로 보유하지 않는다. 대출 후에는 해당 채권을 유동화시켜 이를 다른 곳에 투자하거나 운용한다. 자본 규제를 충족하려면 안전한 곳에 운용해야 한다. 대표적인 자산이 미국 국채와 주택저당(Mortgage) 채권이다. 금리가 오르면 채권 가격도 하락하고 은행들은 평가손실을 손익에 반영해야 한다. 미국 은행예금의 95%는 예금자보호범위 밖이다. 대규모 손실로 건전성이 훼손되면 예금자들은 불안해진다. 예금액을 예금자보호 한도 이내로 줄이거나 더 안전한 은행으로 예금을 옮기기 위한 인출사태(bank run)가 나타날 수 있다. 대규모 인출이 벌어지면 해당 은행은 채권 등 보유 자산을 헐값에라도 팔아 현금을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국채 등 자산가격이 하락하면 이를 보유한 다른 은행들 역시 같은 악순환의 고리에 빠질 수 있다. 국채 시장이 충격을 받으면 회사채 시장까지 얼어붙게 된다. 자금시장이 마비되면 멀쩡한 기업들도 돈을 구하지 못해 부도가 날 수 있다.
▶어떻게 수습될까
12일 연준과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일단 SVB 예금을 전액 보증하기로 했다. 예금자보호 원칙을 깬 이례적 조치이자 신속한 대응이다. 예금인출 사태를 조기에 막지 못하면 다른 은행들로 유동성 위기가 전염돼 채권시장과 금융시스템 전반이 마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은 부동산 등 기초자산 가치가 하락하면 원리금 회수를 담보할 수 없는 파생상품 문제에서 비롯됐다. 이 때문에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은행의 건전성 규제를 대폭 강화한다. 위험자산 투자가 엄격히 제한되면서 은행들은 국채나 모기지 채권 등 비교적 안전한 자산을 주로 보유하게 됐다. 금리 변화나 유동성 경색에 따른 평가·매매손실 위험은 있지만 만기까지 보유하면 원리금 회수가 가능한 자산들이다. 연준과 FDIC가 예금을 전액 보증해도 미국 정부는 재정 손실을 피할 수 있다. 일단 뱅크런을 막은 후 미국 금융당국은 채권 평가손실 등으로 악화된 은행들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조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증자나 합병 등이 유력하다.
▶시스템 리스크인가
은행이 부실로 인한 지급불능이 아니다. 국채 가격 급락으로 은행 경영이 악화되면 예금을 찾기 어려울 수 있다는 불안이 원인이다. 불안을 잠재우면 인출 사태의 도미노 확산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꼽히는 미국 국채에 대한 불안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다. 연준이 계속 금리를 올리면 국채 가격 하락으로 은행들의 채권 평가 손실과 유동성 위험은 계속될 수 있다. 정부의 예금보증에도 불구하고 예금주 입장에서는 좀 더 안전한 은행으로 돈을 옮기고 싶어질 수 있다. 재무구조가 취약한 중소·지방은행에서 위기가 재발될 가능성이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국채 중심의 은행 자산 구성과 유동성 위험에 취약한 만기불일치(mismatch) 구조가 개선되어야 한다.
▶시장에 미칠 영향은
SVB 예금 보증에는 FDIC 뿐 아니라 연준도 나섰다. 뱅크런을 막으려면 은행들이 보유한 국채가 언제든 현금화 될 수 있어야 한다. 중앙은행이 매입하거나 돈을 빌려주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이 필요한 시기에 중앙은행이 국채를 대규모로 매입하면 스스로 긴축의 효과를 무력화하는 모양이 된다. 뱅크런 ‘불씨’가 될 국채가격 추가 하락 불안을 잠재우려면 내주 예정된 공개시장조작회의(FOMC)에서 기준금리 인상을 자제해야 할 수도 있다. 긴축이 제한되면 주식시장에는 호재다. 하지만 미국의 뱅크런 공포가 전세계 자금의 단기부동화를 자극할 수 있다. 달러 현금 선호는 극도의 위험 회피다. 이번 사태로 신흥국 주식 등 상대적으로 위험이 높은 자산들의 인기가 낮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ky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