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제 노력에도 계속 부활
금융 사고에도 연임 당연
CEO ‘염치불구’ 개선돼야
공자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주공 단(周公 旦)이다. 주 문왕의 넷째 아들로 창업공신이다. 형인 무왕이 죽고 어린 조카 성왕이 즉위하자 섭정을 맡는다. 다들 주공이 조카를 내쫓고 왕위에 오를 것이라 의심했다. 주공은 성왕이 성년이 되자 기원전 1000년 7년간 잡았던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다.
기원전 841년 폭정을 일삼던 여왕(厲王)이 반란으로 쫓겨난다. 그의 어린 아들 선왕(宣王)이 즉위하기 전까지 신하 두 사람(周定公, 召穆公)이 함께 14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사마천이 사기에 이 때를 ‘공화(共和)’로 적으면서 ‘공화정’의 어원이 됐다. 주·소 두 사람 역시 스스로 권력을 내려 놓는다.
고대로마에서는 임기 1년의 집정관이 국정 책임자였다. 하지만 비상시에는 권력을 한 사람에 집중하는 독재관(dictator) 제도를 운용했다. 원로원은 독재관 선임에 앞서 그 이유를 분명히 했고 임기도 6개월 정도로 짧았다. 선임 이유가 해소되면 독재관 스스로 물러났다.
기원전 81년 내전 승리로 무력을 독점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독재관에 오른다. 선임 이유가 ‘법 제정과 공화국 재건’이어서 임기가 없었다. 술라에게 공화정의 지향점은 귀족정이었다. 원로원에 맞서는 민회와 호민관 권한을 약화시키는 ‘피의 숙청’을 단행하며 2년만에 독재관을 사임한다.
술라가 탄압했던 민중파 가운데 살아남은 이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술라 바로 다음 독재관이 기원전 49년 취임한 바로 그다. 민회 개최를 위해 독재관에 취임한 카이사르는 따로 임기를 정하지 않았다. 그는 ‘최고사령관(Imperator)’을 자칭하며 모든 권력을 자신에 집중시켰다.
기원전 45년 카이사르가 암살 당하며 더 이상 로마에서 독재관은 등장하지 못한다. 옥타비아누스가 원수정(Principatus)을 시작하며 사실상의 제정으로 돌입한다. 옥타비아누스 때도 원로원이나 민회는 존재했지만, 이들의 권한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자신이 독점한다.
1796년 조지 워싱턴이 연임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밝혔을 때 당시 상당수 미국인들은 그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독립을 이끈 주인공인 워싱턴을 사실상 왕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워싱턴 덕분에 미국 대통령은 한 차례만 연임할 수 있다는 관례가 정착됐다.
이후 3선 도전이 있었지만 성공한 사람은 2차 세계대전 때 플랭클린 루스벨트가 유일하다. 그를 제외하면 성공한 이도 없다. F.루스벨트 이후 미국은 헌법에 3연임 금지를 명문화한다. 이후 대통령제 국가들에서는 3연임 제한이 보편화된다. 이 제한이 없어진 나라는 거의 다 독재화됐다.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 이후 꼭 10년이 지난 1799년 나폴레옹이 쿠테타로 프랑스의 종신 통령에 오른다. 1804년에는 아예 황제가 된다. 프랑스는 1870년이 되어서야 공화제가 확립된다. 이후 프랑스는 샤들 드골 대통령 집권 때 독재 우려가 커지지만 ‘68운동’으로 이를 저지한다.
1912년 쑨원(孫文) 등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수립된다. 하지만 권력은 군사력을 가진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로 넘어간다. 1914년 위안은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2년뒤 공화정이 회복되지만 내전을 거쳐 국민당 장제스(蔣介石)가 장기집권한다.
공산혁명 후 중국은 당과 정부 수장 자리가 분리된 구조였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사실상 이를 모두 겸임하며 권력을 독점했다. 마오의 독재는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진다. 문혁 때 밀려났지만 마오 사망 후 강력한 카리스마로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鄧小平)은 독재를 막기 위해 여러 장치를 만든다.
국가주석과 당 서기를 분리시키고 당 지도부에 임기제(10년)과 65세 이후 신임제한 등을 도입한다. 후임자로 당시 베이징에 권력 기반이 없었던 상하이 출신 장쩌민(江澤民)을 내세우면서도 그 다음 지도자로는 ‘공산주의청년단’ 출신의 후진타오(胡錦濤)를 내정해 독재를 예방한다.
장은 67세에 취임해 77세에 퇴임하고, 후는 61세에 집권해 71세에 물러난다. 시진핑(習近平)은 60세에 취임 했지만 전임자들과 달리 스스로 임기제를 폐지하면서 최소 75세까지 연임이 확정됐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강대국 가운데 종신집권이 가능해진 두번째 지도자다.
금융권에서 가장 힘 센 자리가 4대 금융지주 회장이다. 일단 한번 차지하면 ‘큰 잘못’이 없는 한 3연임은 거뜬하다. 그나마 각 사별로 도입된 ‘만 70세 제한’ 내규가 아니었다면 4연임, 5연임까지 가능했을 지 모른다. 은행장 경력까지 포함하면 13년 이상 금융권에서 최정상을 유지할 수 있는 셈이다.
조용병 신한지주 회장이 3연임을 포기했다. 전임자인 한동우 회장도 3연임을 포기했었다. 조 회장은 3연임을 위한 후보면접에 참여했다 기권했다. 한 전 회장은 아예 후보에도 나서지 않았다.
조 회장은 “훌륭한 후배들이 (후보로) 올라왔기 때문에 세대교체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함께 후보로 오른 진옥동 신한은행장과 임영진 신한카드 사장은 조 회장이 3년전 연임할 때도 후보로서 경쟁했다. 진 행장은 조 회장보다 4살 작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80년 중소기업은행에서 첫 경력을 시작했다. 조 회장은 1984년 신한은행에 입사했다. ‘후배’라고 하기 좀 애매하다.
아마 조 회장의 연임포기의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듯하다.
조 회장은 “가장 마음이 아픈 건 고객들이 (사모펀드 등으로) 피해를 많이 봤다”며 “그것 때문에 직원들이 징계도 많이 받았고, 제가 직접 최고경영자(CEO) 사표를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누군가는 (라임사태 등에 대해) 책임을 지고 정리를 해야겠단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2019년 터진 사모펀드 사태는 우리 금융권의 저급한 수준을 드러낸 사건이다. 많은 투자자들이 피해를 봤고, 그 책임을 지고 적지 않은 금융회사 직원들이 처벌이나 제재를 받았다. 그럼에도 3년이 지난 지금 세간의 관심은 당시 사태로 제재를 받은 CEO들이 연임할 수 있을 지 여부다.
당시 법령으로 보면 금융당국이 CEO들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 지 애매하다. 실무자의 잘못이 클 수도 있고, CEO가 미리 알았다면 막았을 지도 모른다. 연임을 제한하는 중징계는 극저항하면서, 경징계에는 큰 불만이 없는 모습이다. 나름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은 예의염치(禮義廉恥)를 나라를 지탱하는 ‘네가지 벼리(四維)’로 꼽았다. 예의, 의리, 체면, 부끄러움이다. 관중은 이 넷중 하나가 없으면 기울고, 둘이 없으면 위태롭고, 셋이 없으면 뒤집어지고, 넷 모두 없으면 파멸한다고 했다.
조 회장 사퇴 배경에 대해 외압설이 나온다. 가장 많은 금융권 인사가 이뤄졌던 이명박 정부 때 인사들이 현 정부에서 중용되고 있다. BNK금융 회장이 스스로 물러나고 NH농협금융 회장의 연임이 무산됐다. 사모펀드 사태와 관련해 우리금융지주 손태승 회장의 연임 포기설까지 나온다.
설령 “염치를 좀 알라”는 외압이 있었더라도 이를 잘못됐다고 단정하기 애매하다. 당장 법적으로 큰 약점이 없는 조 회장 입장에서는 버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신한사태 이후 그룹을 하나로 다시 묶겠다고 약속했던 조 회장이다. 세번째 임기 동안 회사가 다시 흔들리면 지난 6년까지 오점이 된다.
회장이 사외이사를 뽑고 그 사외이사가 회장을 뽑는 게 금융지주들의 지배구조다. 나이 제한이 아닌데 바뀌면 외압 의혹이 나온다. 독재가 아니라면 당연한 연임이란 없다. 명분이 좋더라도 외압은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경영진 선임권은 주주가 가져야 한다. 명확한 기준과 절차 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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