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1일 지방선거 현수막, 10만장 훌쩍 넘을 듯
소극적인 정치권, ‘현수막 없는 선거’ 엄두 못 내
복합 소재인 탓에 단순 재단·재봉 재활용 그쳐
재활용업체 “소비 제한적…현수막 자체 줄여야”
지난 12일 경기 수원시의 한 현수막 제작업체의 공장 내부. 다음달 1일 치러지는 제8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 업체는 1400여장의 현수막 제작 의뢰를 받았다. 이 업체 관계자는 “선거가 있으면 월매출이 평상시의 2배 이상으로 뛴다”고 설명했다. 신현주 기자 |
[헤럴드경제=최준선·신현주 기자] “당연히 대목이죠. 선거철에는 월매출이 평상시의 두 배로 뛰어요.”
지난 12일 오후 인쇄업체들이 즐비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한 아파트형 공장 건물은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와 잉크 냄새로 가득 찼다. 유독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선거현수막 제작업체들이다. 다음달 1일 치러질 제8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날부터 후보자 등록이 시작되면서 업체 직원들은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3월 대통령선거 당시 한 야당 후보의 현수막을 제작했다는 A업체는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1400여장의 거리현수막 제작 의뢰를 받았다. 장당 대금은 5만5000원으로, 해당 주문으로만 약 8000만원 매출을 올리게 됐다.
A업체 관계자는 “우리 회사는 영등포 인근 업체들과 비교해도 규모가 작은 편”이라고 말했다. 실제 건물 외벽을 덮는 대형 현수막의 경우 비용이 15만원부터 40만원까지 다양하다. 업체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후보자가 수천명에 이르는 지방선거철엔 단 2주 유세를 위한 현수막시장 규모가 100억원을 웃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녹색연합 등 복수 환경단체에 따르면, 지난 2018년 제7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와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선거, 지난 3월 치러진 제20대 대통령선거 등 최근 세 차례의 국정선거기간 제작된 선거현수막은 총 27만3862장으로 추산된다.
특히 2018년 지방선거에서만 총 13만8192장의 현수막이 제작됐다.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의원, 교육감 등을 함께 선출해 등록 후보자가 1만명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현수막 길이를 10m로 가정하고 한 줄로 이으면 그 길이가 1382㎞에 이른다. 인천공항에서 일본 나리타국제공항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환경부 집계에 따르면, 그 무게는 9220t에 달했다.
올해 지방선거의 경우 후보자 수가 7616명으로, 비교적 줄었다. 하지만 지난 선거처럼 후보자 1명당 평균 15개의 현수막을 제작한다고 가정하면, 올해 역시 10만장이 훌쩍 넘는 현수막이 제작될 것으로 보인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 |
문제는 선거가 끝난 뒤다. 현수막은 약 2주간의 선거운동기간이 끝나자마자 처리가 곤란한 쓰레기로 전락한다. 소재가 단일화돼 있다면 잘게 분쇄해 녹인 뒤 원재료로 활용될 수 있지만 현수막은 폴리에스터나 나일론 등 합성섬유를 천 소재와 결합해 제작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은 소각 또는 매립 처리되고 있다.
현수막 등 오프라인 홍보물을 줄이고 온라인 홍보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환경단체의 지적은 수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소극적이다.
국민의힘 공보실 관계자는 “지방선거의 유인물 배포 등 홍보 전략은 각 후보자의 방침에 따라 세워지며, 당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가이드라인을 내린 것은 없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선대위 관계자 역시 “당 차원에서 지역 후보자들에게 현수막의 친환경적 사용과 관련해 전달한 권고사항은 없다”고 전했다.
정부와 지자체는 현수막 쓰레기 문제를 인지하고 그 대안으로 재활용을 내걸고 있다. 지난 3월 행정안전부가 대선 이후 수거된 폐현수막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사업을 벌여 전국 22곳의 지자체를 선정한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재활용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수거된 폐현수막은 소재가 복합적으로 사용된 탓에 대부분 단순 재단·재봉을 거쳐 쓰레기마대나 장바구니로 제작된다. 이 제품들은 주로 관공서가 구입해 재래시장이나 폐기물집하장에 비닐 대체용으로 배부하거나 친환경 행사를 진행하려는 시민단체 및 기업이 구매한다. 이 밖에 일반소비자들을 대상으로는 시장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실제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21대 국회의원선거, 2021년 재보궐선거 당시 폐현수막 재활용률은 줄곧 20~30% 수준에 그쳤다.
지난 17일 경기 파주시 송촌동에 있는 폐현수막 재활용 마을기업 ‘녹색발전소’의 공장 내부. 설치된 후 짧게는 수십분 만에 철거된 깨끗한 폐현수막들이 가득 쌓여 있다. 김순철 녹색발전소 대표는 “공장으로 들어오는 폐현수막은 한 달에 3000~4000장 수준으로, 선거가 있을 때는 수거량이 20% 이상 늘어난다”고 말했다. 최준선 기자 |
4년 전부터 폐현수막 재활용사업을 하고 있는 비영리단체 ‘나그네다문화센터’의 허재만 대표는 “인쇄 과정에 쓰인 잉크 등 화학제품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마대나 에코백 외에 용도로는 재활용되기 어렵다”며 “재활용이 정말 의미 있으려면 더 많은 지자체가 관련예산을 책정하거나 현수막이 처음부터 친환경적인 소재로 제작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부터 폐현수막 재활용사업을 이어온 마을기업 ‘녹색발전소’의 김순철 대표는 “폐현수막 재활용은 당장 값싼 중국산 폴리프로필렌(PP) 마대를 일부 대체하는 데에 의미가 있을 뿐, 최종적으로는 더 적게 생산하는 것이 환경을 생각한다면 맞는 방향”이라며 “선관위와 정당, 지자체가 함께 만나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꼬집었다.
폐현수막 재활용이 ‘그린워싱(위장 환경주의)’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우려도 있다. 수만개씩 제작되는 것에 비해 재활용되는 현수막의 규모는 턱없이 적은데도 ‘재활용되기 때문에 마구 써도 괜찮다’는 인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이미 업계에선 제품의 일부분만 폐현수막을 사용하고 재활용제품이라고 홍보하는 업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재활용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허승은 녹색연합 녹색사회팀장은 “이미 폐현수막 재활용사업은 효과가 적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현수막 사용을 금지하도록 공직선거법을 개정하는 등 재활용이 아닌 사용 최소화 방안이 우선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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