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편집자주
어릴 적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기분 탓일 수 있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그림,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그림,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그림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일부), 208 x 264.5cm, 1863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아이고, 망측해라. 이런 걸 출품했었다고?" "벌거벗은 저 여자는 뭐 때문에 우리를 빤히 쳐다보나."

1863년 프랑스 파리의 한 전시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요. 수많은 사람이 한 작품을 보고 삿대질합니다. 살구색이 한껏 돋보이는 이 작품은 논란의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말세일세. 말세야." 주름살이 깊게 팬 노인들은 못 볼 장면을 본 듯 고개를 내젓습니다. "이건 우릴 향한 모욕이야!" 쫙 빼입은 정장 차림의 청년 무리 틈에서는 격정적인 목소리도 나옵니다. 심지어 평론가들 사이에선 "캔버스에 물감만 잔뜩 묻혀 망쳐놨다"는 비난까지 들끓습니다. 차라리 그림이었기에 다행입니다. 그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분명 행사장 아래로 끌어내려졌을 테니까요.

이제 막 30대를 맞은 한 남성은 자신의 그림이 겪는 수모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면서 "참나, 수준이 이래서야…"라고 중얼거립니다. 약간은 당황한 기색도 보입니다. 그는 당시 프랑스 미술계의 이단아로 치부되던 화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1883)였습니다. 작품 아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원제 : 목욕)라는 이름표가 보입니다. 당시 평론가와 관람객은 몰랐습니다. 심지어 마네 자신조차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머지않은 미래, 그가 이 작품 덕에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게 될 줄은요.

흔히 볼 수 있는 누드화 아니야?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208 x 264.5cm, 1863

젊은 남녀 두 쌍이 인적 드문 숲속에서 소풍을 즐기고 있습니다. 남자 둘은 한껏 꾸몄습니다. 머리를 잘 다듬은 가운데 남성은 흰색 바지를 입은 채 비스듬히 앉아 있습니다. 돈도 많고 옷은 더 많은지, 흙먼지 따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른편의 남성은요. 모자부터 구두, 지팡이까지 다 비싸 보입니다. 들어 올린 오른팔, 반쯤 누워있는 자세에서 자신감과 여유로움이 느껴집니다. 소위 '잘 나가는' 부르주아 자제 느낌이 물씬 납니다.

사실 이 그림에서 두 남성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지요. 눈길을 끄는 이는 두 남성과 함께 앉은 한 여성입니다. 벌거벗은 몸, 꾸밈없는 체형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태연한 표정이 압권입니다. "안녕?" 이 여성은 관람객들에게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네는 듯합니다. 이들 무리와 떨어진 채 홀로 목욕하는 여인 또한 쑥스러움보다 즐거움이 더 커 보입니다. 여인의 옷가지로 보이는 천도 있습니다. 왼쪽 아래에는 빵과 술병, 과일 등이 뒹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 150년 전이라고 해도 이런 그림에 "외설스럽다!"며 깜짝 놀랄 만큼의 닫힌 시대는 아니었는데요. 그렇다면 마네의 이 그림은 그 당시 왜 희대의 문제작으로 칭해졌을까요.

부르주아·관람객 “어머나, 망측해라!”

마네의 작품을 공격한 부류는 크게 두 그룹입니다.

먼저 당시 프랑스 부르주아와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입니다. 부르주아 남성이 성을 파는 여성과 밀회를 갖는 순간을 적나라하게 그렸기 때문입니다. 요즘으로 치면요. 부유층에 속한 사람들이 도심 외곽 어딘가의 저택에서 난잡한 파티를 벌이는 장면 정도가 묘사된 걸로 봐도 되겠습니다. 전시장을 찾은 부르주아 남성 중 몇몇은 진짜 억울해서, 또 다른 몇몇은 치부가 훤히 드러난 기분이라 분노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관람객은 마치 부적절한 현장의 목격자가 된 느낌이 들어 불쾌해 했지요. 앉아있는 여성은 분명 관람객과 눈맞춤을 하고 있습니다. 마네가 관람객을 도발하기 위해 이런 장치를 뒀다고 생각한 겁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구성

두 번째 그룹은 기성 화단입니다. 이들은 이 그림을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기성 화단은 누드의 허용 범위를 신화 인물을 그리는 일에만 관대히 적용했습니다. 또, 그림 중 최고는 신과 영웅, 기독교 성인이 등장하는 역사·종교화였습니다. 그림에는 1~2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주제가 있어야 했고, 특히나 보는 사람에게 깨달음을 전해줘야 명작 반열에 들 수 있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일부), 208 x 264.5cm, 1863

마네의 이 그림에는 신과 성인의 누드가 아닌 인간의 누드가 있습니다. 심지어 실존 인물들입니다. 앉아 있는 여성은 마네의 동료 화가인 빅토린 뫼랑입니다. 가운데 남성은 후일 마네의 매제가 되는 사람, 오른쪽 남성은 마네의 동생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흔한 '하트 화살'을 쏘는 큐피드도 없습니다. 그 시대의 '뽀샵'으로 횡행하던 비율 조정 등의 보정도 없습니다. "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봤다면 이렇게 외쳤을 듯합니다. 사실 마네가 말이라도 "이 그림은 신화를 차용했다"고 했었다면 파장은 훨씬 적었을 겁니다. 실제로 그 시대 화가 중 상당수는 노골적인 누드를 그리고도 외설 논란에서 자유롭기 위해 여신 이름을 그림 제목에 붙이기도 했습니다.

기법도, 크기도…기성 화단 “어쭈?”
티치아노, 전원 음악회, 105 x 136cm, 1509

기성 화단은 마네의 그림 기법을 놓고도 태클을 겁니다.

마네의 이 작품은 두 거장의 그림을 참고했습니다. 하나는 티치아노의 '전원 음악회', 다른 하나는 16세기 이탈리아 판화가인 라이몬디가 모사한 동판화로 알려진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입니다. 이들은 마네가 이런 세기의 명작들을 제멋대로 그린 일을 묵과하기 힘들었습니다. 당시 화가들은 그림 수업에서 '중간색'을 쓰라고 교육받았지요. 가장 밝은색과 가장 어두운색을 매끄럽게 이어주는 색입니다. 명암을 자연스레 표현할 수 있고, 붓 자국도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마네의 이 그림에는 중간색도 없었습니다. 창백한 살색과 짙푸른 녹색은 물과 기름처럼 다릅니다. 명암이 강하게 대비돼 화면은 다소 평면적으로 보입니다. 붓 자국도 대놓고 드러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일부), 208 x 264.5cm, 1863

원근법도 무시했습니다. 가령 그림 한가운데에서 목욕하는 여성은 그 오른편에 있는 배와 비교할 때 너무 크게 그려졌습니다. 전통을 떠받들던 주류 화가들은 뚜껑이 열릴 노릇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기성 화단에선 "건방지게 미완성작을 내놨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한 번 미운털이 박히면 끝까지 미워 보인다는 말이 있지요.

이 그림은 크기도 문제가 됩니다. 기성 화단의 눈에는 그저 망측한 소풍 그림으로 보이는데, 웅장한 역사화에나 어울릴 법한 208 x 264.5cm의 큰 크기로 그렸다니요. "어쭈?"라고 생각했겠지요.

마네의 속마음…‘아니, 뭐 이렇게까지’

그렇다면 마네는 왜 그렸을까요.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마네는 절친인 앙토냉 프루스트와 함께 강변에서 여유를 즐겼습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수많은 그림 중 '우리 시대의 누드'가 없다는 점을 새삼스레 느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누드를 그린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 시작은 그저 흥미 내지 재미였던 겁니다. 물론 당시 젊은 화가들도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은 했을 겁니다. 이 가운데 마네가 결국 사고를 친 이유는요. 그의 추진력과 반골 성향에 주목할 만합니다. 1832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마네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도 판사, 아버지도 판사였습니다. 어머니는 외교관의 딸이었습니다. 재산은 탄탄했고, 집안 분위기는 상식적이었지요. 때로는 이런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 집안에서 반항아가 탄생하는 법입니다. 마네는 17세에 남아메리카 항로의 견습 사원으로 일했는데, 거기서 겪은 험한 뱃일이 그의 반항적 기질에 더 영향을 줬을지도 모릅니다.

토마 쿠튀르, 타락한 로마인들, 472 x 772cm, 1847

1850년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한 마네는 곧장 역사 화가로 이름을 알린 화가 토마 쿠튀르의 스튜디오에서 6년간 그림을 배웁니다. 그는 중학생 시절부터 화가의 삶도 '플랜B'로 생각했거든요. 마네는 쿠튀르와도 지겹게 싸웠습니다. 그 사이 루브르를 찾아 명화 모사 훈련도 열심히 했지요. 그는 프란시스코 고야,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파격적 시도의 선구자들입니다. 그는 변화의 DNA를 수혈받고 있었습니다.

마네의 목표는 살롱전 제패였습니다. 당시 파리에서 열린 살롱전은 인정에 목마른 청년 화가라면 꼭 거쳐야 할 길이었습니다. 마네는 1861년 살롱전에서 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큰 주목은 못 받았습니다.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그렸더니 고작 이런 식으로밖에 취급을 안 해?" 자존심이 센 마네가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장면이 쉽게 상상됩니다. 마네의 반골 기질은 이때 날개를 활짝 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그가 살롱전에 다시 낸 작품이 바로 이 작품, '풀밭 위의 점심 식사'였습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를 즐기고 싶으면 313년을 외우기를 권장합니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 등을 전격 수용키로 결정하고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는 해입니다. 미술사를 즐기고 싶다면 암기하기 좋은 연도가 1863년입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낙선전(落選展)이 열린 해입니다. 마네와 함께 세잔, 모네, 피사로 등 그 시대 가장 혁신적인 작품들이 이 전시를 통해 일반에 처음 전시된 해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살롱전 심사에서 '광탈(광속 탈락)'한 마네의 이 작품은 낙선전에서 세상 빛을 봅니다. 이는 당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지시로 열린 전시였습니다. 심사에서 떨어진 작품들을 모아놓은 행사였습니다. 개관 당일 7000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렸지만 대부분은 심심풀이로 이곳을 찾았습니다. 대놓고 비난할 작품을 찾기 위해 온 언론과 비평가도 많았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마네의 이 그림은 훌륭한 먹잇감이었지요. 논란은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마네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당대 최고로 주목받는 화가가 됩니다. 아이러니하게 갖은 논란을 낳은 낙선전은 살롱전 버금가는 흥행을 합니다. 나폴레옹 3세는 낙선전의 예상치 못한 파급력에 놀라 더 이상 이 전시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낙선전은 단 1회로 끝나고 맙니다.

정신 차려보니 초신성의 아이돌

"저 사람 봐. 한 번은 사고 칠 줄 알았다니까." 다혈질인데다 꽂히면 해야 하는 마네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의 말이었지요.

그런데요. 그의 시도를 보고 "와! 진짜 저렇게 해도 돼?"라며 놀라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조롱 조가 아니고요. 진짜 부러워했습니다. 이른 미래에 인상주의 시대를 주도하는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등 청년 화가 무리였습니다. 이들은 마네의 행보를 보고 새로운 시대를 예감했습니다. 당장 자신들의 개성 있는 그림들은 제대로 인정 못 받지만 주류는 곧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안목 있던 비평가 에밀 졸라는 마네를 향해 빗발치는 기성 화단의 비난 속에서도 "내가 부자라면 마네의 작품을 다 사들여도 값이 싸다고 생각했을 텐데"라며 찬사를 보냈습니다. 마네는 이들 사이에서 아이돌이 됩니다. 그는 그럴 의도까지는 없었는데 인상주의의 문을 활짝 열게 됩니다.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게 됩니다.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266 x 345cm, 1814
에두아르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93 x 284cm, 1864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마네는 어쩌면 자기가 자극한 인상주의의 새싹들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돈 없는 후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경제적 지원은 마다하지 않았지만, 이들과 동료로 치부되기는 싫어 함께 밥도 안 먹습니다. 전시도 같이 안 합니다. 마네는 몇 차례 스캔들을 일으키면서도 기성 화단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썼습니다. 문제아가 아닌 혁신가로 인정받은 들라크루아, 고야, 벨라스케스의 길을 걷고 싶었던 겁니다. "이단아로 기록될 수 없어. 나는 고야 같은 선구자야!" 마네의 괴팍한 혼잣말이 들리실까요?

두 마리 토끼, 결국 다 잡았다
에두아르 마네.

마네는 말년에 류머티즘 질환으로 고생합니다. 병세가 심해질수록 근육 피로가 덜한 파스텔화 위주의 작품 활동했지요. 그는 1883년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래도 말년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습니다.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서 공로가 인정되는 사람에게 국가 지도자가 직접 주는 상입니다. 결과적으로 동네북처럼 비난받던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룬 셈이 됐지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돈키호테의 대사가 떠오르는 삶입니다.

yul@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